[데일리포커스] 한국의 쌀 지원도 거부하는 북한의 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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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께 촬영된 평안남도 순천 지역 풍경. 곡물을 흥정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 보인다./사진=데일리NK

북한 측이 한국의 대북 식량지원을 수령하지 않겠다는 의견을 세계식량기구(WFP) 측에 피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겉으로는 다음 달 초부터 시작되는 한미연합훈련에 반발하는 모양새지만 근본적인 북한 태도에는 ‘통미배남(通美排南)’의 의도가 녹아있다. 이로써 ‘역사적인’ 판문점 남-북-미 3자 회동은 한 달도 채 안 되어 그 의미가 심각하게 훼손됐다.

한국은 대북 쌀 지원을 공식화하며 ‘인도적’ 목적임을 분명히 하고 있으나 북한 당국은 ‘정치적’ 대응으로 일관했다. 이번에 한국 정부가 북한에 쌀 5만 톤을 지원하기로 한 것은 지난 6월 5일 ‘인도적 지원’ 명목으로 국제기구에 800만 달러(94억 원)를 공여한 데 이은 추가 대북 지원이다. 그러나 한국의 대북 식량지원과 관련하여 북한은 최근 WFP(세계식량계획)와의 실무협의 과정에서 한미연합훈련을 문제 삼으며 수령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식량난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북한 당국이다. 그런 북한을 대상으로 한국 정부가 아무리 ‘인도적’ 목적을 내건다 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는 북한 당국이 그것을 곧이곧대로 수용할 리는 없었다. 지난 18일에도 <노동신문>은 제11차 평양백화점 상품전시회를 소개하며 “1층의 식료품 전시대만 놓고 보더라도 전국의 200개 단위에서 출품한 2700여 종, 수십만 점의 식료품이 꽉 차 있었다”고 선전했다. 심지어는 쌀과 옥수수로 술을 빚어 ‘평양소주’ ‘평양주’와 같은 증류주를 만들어 중국 등으로 수출까지 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대북 제재가 아무리 가열차게 진행된다 해도 자력자강을 앞세운 북한 경제는 끄떡없다는 점을 과시하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유례없는 제재 속에서도 북한은 정말 식량난을 겪지 않는 것일까. 평양의 특권층은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정말 식량난으로 고통받는 계층은 북한 주민들이다. 북한 당국의 ‘자력갱생’ 구호가 적용되는 대상 역시 주민들일 뿐 북한 특권층은 정권에 대한 충성의 대가를 향유하고 있다. <노동신문>이 밝힌 평양 백화점의 호황이 그 증거다. 북한 당국의 계산으로는 어차피 평양의 핵심계층만 안고 가면 정권 안보는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인식하고 있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인도적’ 명분으로 지원해주는 쌀을 북한 당국이 주민들을 상대로 장사하고 있다는 정황이 확인됐다. 7월 24일 데일리NK가 평안북도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북한 주민들은 한국이 지원한 쌀을 시장에서 구입해서 먹는다고 한다. 주민들은 “예전에 마대에 대한민국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장마당에서 보고 사먹었지, 식량 공급받은 것은 없다”며 “백성들은 식량 공급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민들을 상대로 지원받은 쌀을 판매해서 얻은 수익은 김정은의 통치 자금으로 흘러들어갈 공산이 크다. 대북지원 무용론이 나오고 있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전방위적인 대북제재가 실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당국에게 필요한 ‘쌀’은 핵심 계층을 관리할 정도일 것이다. 나머지 일반 주민들은 각자도생하라는 것이다. 이 같은 북한 당국의 셈법을 지지하고 지원해 주는 게 중국이다. 중국 해관총서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지난해 김정은의 방중을 계기로 북한에 쌀 1천 톤과 비료 16만 2천여 톤을 지원했다. 한화로는 쌀은 약 12억여 원 어치고, 비료는 약 654억 원이다. 이를 모두 합치면 지난해 중국이 660억여 원 어치의 쌀과 비료를 북한에 지원한 것이다. 뿐만아니라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북한 해외노동자들의 본국 송환을 가장 주저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북한 노동자들의 불법 고용이 김정은의 통치자금 조달을 위한 외화벌이에 중요한 재원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처럼 중국, 러시아 등 대북제재의 뒷문을 열어주는 세력이 있는 한, 북한은 핵심 지지층을 끌어안고 그럭저럭 버티기(muddling through)에 지속적으로 성공할 것이다. 중국, 러시아 등 뒤를 봐주는 강대국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당국은 핵심적인 특권층의 이해관계만 보장해주면 정권 안보에도 별 무리가 없을 것으로 계산하고 있을지 모른다.

지난해 이후 상황이 이렇게 급변했는데 북한 당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 정부가 어떤 효용가치가 있을까. 지난해 미국과의 대화 물꼬를 트기 위해선 한국 정부의 중재가 필요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과는 서먹서먹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의 전략적 몸값이 급상승하면서 중국과 완전한 관계 복원에 성공하고, 한국 정부를 통해선 제재 해제는커녕 일부 제재의 완화까지도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한 김정은에게 한국 정부는 더 이상 걸림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지난 6월 27일 권정근 북한 외무성 미국 국장은 다음과 같은 논평을 발표했다.

·미관계를 중재하는 듯이 여론화하면서 몸을 올려보려 하는 남조선 당국자들에게도 한마디 하고 싶다. 지금 남조선 당국자들은 저들도 한판 끼여 무엇인가 크게 하고 있는 듯한 냄새를 피우면서 제 설 자리를 찾아보려고 북남 사이에도 여전히 다양한 경로로 그 무슨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듯한 여론을 돌리고 있다.

·미대화 당사자는 말 그대로 우리와 미국이며 북·미 적대관계의 발생 근원으로 보아도 남조선 당국이 참견할 문제가 전혀 아니다. 세상이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북·미관계는 우리 국무위원회 위원장 동지와 미국 대통령 사이의 친분관계에 기초해나가고 있다. 우리가 미국에 연락할 것이 있으면 북·미 사이에 이미 전부터 가동되고 있는 연락 통로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고 협상을 해도 북·미가 직접 마주 앉아 하게 되는 것인 만큼 남조선 당국을 통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남조선 당국자들이 지금 북·남 사이에도 그 무슨 교류와 물밑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광고하고 있는데 그런 것은 하나도 없다. 남조선 당국의 제 집의 일이나 똑바로 챙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북한 당국은 미국과만 연락하고 협상할 것이니 한국 정부는 빠지라는 것이다. 통미배남하겠다는 선언에 불과하다. 물론 3일 후인 6월 30일 ‘역사적인’ 최초의 판문점 남북미 3자회동이 성사됐으나 당시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미북 두 나라 정상으로부터 거의 배제된 것이나 다름없던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김정은은 지난 23일 SLBM(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을 다수 탑재할 수 있는 신형 잠수함을 시찰하면서 미국과의 실무협상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의도를 나타냈다.

그럼에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계속해서 김정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호감을 느끼고 있는 마당에 북한 당국은 더 이상 한국 정부의 중재나 촉진자 역할을 바라지도 않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경제 지원을 제공해주는 상황에서 한국의 쌀 지원은 북한 당국에게 쌈짓돈처럼 취급될지도 모른다.

요컨대 북한 당국은 한국의 ‘인도적’ 대북 식량지원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도 않을뿐더러 이제는 더 이상 한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한국은 다만 북한의 통치력이 관철되어야 할 대상일 따름이다. 한국 정부는 감상적 대북관을 버리고 냉정한 현실 인식이 뒷받침된 새로운 대북정책을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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